9세기 전후 신라시대에 왜구의 무리가 자인의 도천산에 성을 쌓고 주둔하면서 주민들을 괴롭히자 한장군이 한 꽤를 내어 그들을 섬멸하고자 하였다.

장군은 여자로 가장하여 그의 누이동생과 함께 화려한 꽃관을 쓰고 못둑에서 춤을 추었다. 꽃관을 쓰고 춤을 추는 둘레에는 광대가 둘러서 놀이를 벌였으나 풍악을 올려 흥을 돋구고 못에는 화려하게 꾸민 배를 띄웠다. 둘레에는 어느덧 구경꾼들이 몰려들었고 춤과 가락은 한결 흥겨워졌으니 이것이 곧 여원무이다.

장군의 뜻대로 구경꾼 중에서는 도천산을 내려온 왜의 무리도 섞여 있었다. 그들은 처음에는 경계하는 눈치였으나 여원무의 신기함에 눈이 팔리고, 풍악의 흥겨운메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가운데서 춤을 추던 한장군이 큰소리로 무어라 외쳤다, 함성이 일어남과 함께 왜의 무리들은 칡으로 만든 그물에 휘말려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모조리 죽여 저 연못에 던져라.” 아름다운 꽃춤의 주인공은 무서운 장군으로 바뀌어 외쳤다. 무당과 구경꾼들은 손에는 모두 비수가 번쩍였다. 그물에 휘말린 왜의 무리들은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차례로 쓰러져 갔다.

춤추던 이도 구경꾼도 모두 한장군이 미리 배치해 두었던 무사요, 칡으로 만든 그물도 미리 깔아 두었던 것이다.

왜의 무리들은 몰죽음을 당했고, 못물은 핏빛으로 바뀌었다. 지금도 못둑에는 왜의 무리를 벨때의 칼자국이 남은 바윗돌이 있다.

사람들은 이것을 참왜석 혹은 검흔석이라고 부른다.


그 후 이 고장에는 한장군을 모시는 사당이 생겼고, 해마다 단오절에 제사를 모시어 성대한 놀이가 벌어졌으니, 이것이 곧 ‘한장군놀이’이다. 근세 조선 중기때 송수현이라는 현감이 한장군의 일을 나라에 알려 벼슬을 추시받게 되었다.

현감은 새로 진충사를 지어 한장군을 모시게 되었으니 한묘는 두 개가 되었다. 일제말기에 하나는 헐고 폐쇄 당했다가 해방되어 다시 세워져 오늘에 이르렀다.

‘한장군놀이’는 여원무의 복장을 한장군과 누이동생을 꾸며 앞세우고 그 뒤에 사또 행차를 따르게 한 가장행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