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인은 옛날부터 부촌이며 상업의 중심지로 도시형의 가면극이 생길만한 곳이다.

그러나, 자인 팔광대는 관이 주도한 것도 아니고 상인이 만든 것도 아니며, 상인을 위한 것도 아니다.

다만 이 곳 출신인 한장군이 왜구를 유인하기 위해 만들었고 주민을 구한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비롯된 자인 단오제의 여흥으로 시작한 것이다.

도시형의 가면극은 공연전에 선전을 위한 길놀이를 벌이지만 자인 팔광대는 길놀이가 없다. 또한 도시형의 가면극은 공연시기가 일정하지 않아 명절이나 상업적으로 필요할 때 수시로 공연을 하고, 농촌형은 보통 정초에 시작하는데 자인 팔광대는 자인 단오제가 개최될 때만 공연했다.

대사의 첫 부분에 ‘필필이 강산이 화사적하니 도천 갓변에 굿판이 났다’에서 ‘굿’이란 농촌형에 쓰는 명칭이니 자인 팔광대는 농촌형과 도시형의 융합형이라 할 수 있으나 농촌형에 더 근접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자인 팔광대는 실존인물인 한장군에 대해 제사를 올린 후 여흥으로 벌이는 현실적인 오락물임에 반해, 하회탈춤과 강릉의 별신굿은 임의의 성황신을 위한 제사로 무속적인 성격을 띤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가면 제작방법과 공연 후 소각해 버리는 것은 다른 지방과 비슷하다.

공연자는 가면을 쓴 광대가 8명, 악사 4명, 기수 1명 등 도합 13명으로 구성인의 수가 가면극 중에는 가장 적다. 자인 팔광대의 명칭은 바로 가면을 쓴 광대가 8명인데서 명명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극중에 등장하는 양반은 채씨(蔡氏), 본처는 유씨(柳氏), 후처는 뺄씨, 말뚝이는 꼴씨, 봉사는 김씨며, 무당은 남자이므로 박수무당이고, 곱사는 성도 없고 대사도 없다.

주악은 도시형의 가면극보다 단조로운 농악대가 도입되었고, 악은 굿거리, 덧베기, 타령, 무속장단이다.

춤사위는 영남지방의 춤인 덧베기가 주가되고, 특유한 콩나물춤, 무지개춤, 곱사춤, 무당춤이 가미되어 있다. 극 전체가 끊어지거나 정지함이 없고 공연자의 입퇴장도 없이 계속 이어지는데, 편의상 ‘양반?말뚝이 마당’, ‘양반.본처.후처마당’, ‘줄광대.곱사마당’으로 3분 할 수 있다.

축문을 읽고 간단한 고사를 지낸 후 악사들을 앞세우고 전 연기자가 입장하여
“필필이 강산이 화사적하니 도천 갓변에 굿판이 났다.
우리 한바탕 놀자”하면 극이 시작된다.

놀이판을 이끄는 양반은 늙고, 부모 유산을 탕진하였으므로 거지같이 초라한 행색이다.

이어 몰골은 흉칙하지만 근본이 양반이라고 뽐내는 하인 말뚝이가 등장한다.

도시형 가면극에서 말뚝이가 병신이 아니면 저능인인 것과는 대조를 이룬다.

양반이 주도하는 계급사회에서 하인이 양반의 위엄을 뒤집고 양반의 모순을 폭로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만 탈을 씀으로써 가능해진다.

그러나 자인단오제가 유교적인 바탕에서 이루어져 왔으므로 결국은 말뚝이가 굴복하고 양반이 승리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데, 무승부 혹은 양반을 패배시키는 다른 지방의 가면극과는 역시 대조가 된다.

전통적인 유교사회에서, 대를 이어야만 된다는 양반은 본처를 외면하고 말뚝이의 중매로 과부 뺄씨를 후처로 맞아 정답게 놀아난다. 하회나 오광대에서 볼 수 있는 음탕한 장면은 여기서 나타나지 않고 양반과 후처가 사랑을 나누는 창의 가사가 돋보인다. 양반을 찾아다니던 본처가 양반을 만나 돌아오기를 설득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자 발로 쓰러뜨려 양반을 죽인다.

다른 가면극에서 이 부분은 오히려 할미가 죽는 상황으로 처리되어 있어 큰 차이가 난다.

이어 참봉과 박수무당이 등장하여 무당굿으로 양반을 살리는 것은 무속을 드러내려는 것보다는 극의 흐름과 흥을 위해 도입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토신이 붙어 죽은 것을 본처가 살려냈다는 박수무당의 기지는 양반에게 열부인 본처를 재인식시켜 잘못을 사죄하게 하므로 가정의 화합과 조강지처 우선이라는 윤리관을 확인시키는 역할을 하며, 양반의 체통이 무너지는 듯하면서도 결국은 되살아나게 한다.

‘양반.본처.후처 마당’에 이어 ‘줄광대.곱사마당’이 이어진다.

줄타기는 주니(注?), 답색(踏索), 주색(走索)이라고 하는데 큰 줄을 양쪽 기둥에 매어 놓고 재인(才人)이 공중의 줄 위에서 여러 가지 재주를 부리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줄타기의 기원은 확실하지 않으나 삼국시대부터 있었다는 설이 있다.

고려, 조선시대에는 산대도감에 속하여 국가의 경사시에 공연되었는데 민주의 취향으로 변한 것이 남사당패의 어름놀이이다.

자인 팔광대의 줄타기는 땅바닥에 깔아놓은 새끼줄 위에서 아슬아슬한 공중 줄타기 묘기를 흉내내며 줄가에 둘러앉은 연기자들과 재담을 나누는 것으로 어려운 공중곡예가 아니다.

이때 곱사는 줄광대의 흉내를 내며 줄가를 따라 다니고 말뚝이는 북장단을 맞추며 따라다닌다.

이 부분이 바로 자인 팔광대의 흥이 극치에 이르는 곳으로 말뚝이의 북춤과 해학적인 창이 관중을 매료시킨다.

뺄씨와 박수무당은 관중들 앞으로 다니며 성금을 걷는데 이것이 당일 경비를 충당하는 유일한 방법으로 도시가면극에서 길놀이 때 성금을 거출하는 것을 대신한다.

끝으로 전 연기자와 관중들이 어울려 한바탕 뒷풀이가 이어지고 흥이 미흡하면 공연을 되풀이하여 단오절 밤을 지새우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