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구가 도천산에 은거하면서 주민을 괴롭히자 한장군은 누이와 함께 이를 섬멸할 계교를 내고 거짓으로 놀이판을 벌이고 왜구를 유혹하였다. 한장군의 뜻대로 구경꾼 중에는 도천산에서 내려온 왜구의 무리도 섞여 있었다.

그들은 처음에는 경계하는 눈치였으나 여원무의 신기함에 눈이 팔리고 풍악의 흥겨움에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었다. 그 때 가운데 서 춤을 추던 한장군이 큰소리로 무어라 외쳤다. 함성이 일어남과 함께 왜구의 무리들은 칡으로 만든 그물에 휘말려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모조리 죽여 저 연못에 던져라." 아름다운 꽃춤의 주인공은 무서운 장군으로 바뀌어 외쳤다.

무당과 구경꾼들의 손에는 모두 비수가 번쩍였다. 그물에 휘말린 왜구들의 무리들은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차례로 쓰러져 갔다. 춤추던 이도 구경꾼도 모두 한장군이 미리 배치해 두었던 무사요. 칡으로 만든 그물도 미리 깔아 두었던 것이다. 왜구의 무리들은 떼죽음을 당했고 못물은 핏빛으로 바뀌었다.

지금도 못둑에는 왜구의 무리를 벨 때의 칼자국이 남은 바윗돌이 있다. 사람들은 이것을 참왜석 혹은 검흔석이라고 부른다. 그 후 이 고장에는 한장군을 모시는 사당이 생겼고, 해마다 단오절에 제사를 모시어 성대한 놀이가 벌어졌으니, 이것이 곧 '한장군놀이'이다.
'한장군 놀이'는 여원무의 복장을 한 한장군이과 누이동생을 꾸며 앞세우고 그 뒤에 '사또'행차를 따르게 한 가장행렬이다. 그 후에 말달리기와 씨름같은 여흥이 있고, 여자는 그네를 뛰었다. 사방에서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였고 가장행렬에 쓰였던 화관이 귀신을 쫓는 힘이 있다 하여 다투어 얻어갔다.

중요무형문화재 제44호로 지정된 경산자인단오제는 여원무가 그 주체이다. 여원무는 여장한 어린남자의 진무가 펼쳐진 후 10척(3m)의 여원화를 쓰고 땅에 닿는 오색채의(치마)를 입은 2명의 관무부가 중앙에서 덧배기 가락으로 추는 춤이다. 여원화는 채색한 종이로 만든 두 개의 둥근 꽃관과 꽃관 옆에는 오색 종이를 드리웠다.

덧배기의 춤은 경상도에서 널리 춰졌던 춤의 기교를 합한 것으로 6박자의 특유의 굿거리 장단에 잔가락이 많고 어깨춤이 발달된 춤이다. 덧배기 춤은 원천적으로 인간에게 해악을 끼치는 잡것을 베어버린다는 뜻을 품고 있다. 덧배기춤의 덧은 거듭,겹,곱을 뜻하고 배기는 박이다의 음운변화된 동명사형으로 덧배기는 겹쳐 백이는 춤 동작으로 풀이된다.

이 고을에 전승되는 한 장군은 신라 혹은 고려시대의 사람이라고만 8세기 말엽 경 역사의 가치있는 전설이 아닌 실존의 인물로 이 고장 사람들에게 믿어지고 있는 이 고을의 수호신이다. 왜의 무리가 이곳 도천산에 은거하면서 주민들을 괴롭히자 한 장군의 누이와 함께 이를 섬멸할 계략을 써 놀이판을 벌이고 왜구를 유혹하였다. 장군의 뜻대로 구경군중에는 도천산에서 내려온 왜구 무리도 섞여 있었다 그들은 처음에는 경계하는 눈치였으나 여원무의 신기함에 눈이 팔리고 풍악의 흥겨움에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그때 가운데서 춤을 추던 한 장군이 큰소리로 무어라고 외쳤다. 함성이 일어남과 함께 왜의 무리들은 칡으로 만든 그물에 휘말려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모조리 죽여 저 연못에 던져라 아름다운 꽃춤의 주인공은 무서운 장군으로 바뀌어 외쳤다. 그물에 휘말린 왜의 무리들은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차례로 쓰러져 갔다. 왜의 무리들은 몰죽음을 당했고 못물은 핏물로 바뀌었다. 지금도 못둑에는 왜의 무리를 벨 때의 칼자국이 남은 바윗돌이 있다. 사람들은 이것을 참왜석 검흔석 이라고 부른다.

송수현이라는 현감이 한 장군의 일을 나라에 알려 벼슬을 추시받게 되었다. 현감은 새로 진충사를 지어 한 장군을 모시게 되었으니 한묘는 두 개가 되었다. 일제말기에 하나는 헐리고 폐쇄 당했다가 해방이 되어 다시 세워져 오늘에 이르렀다.

호장굿은 여원무의 복장을 한 한장군과 누이동생을 꾸며 앞세우고 그 뒤에 사또 행차를 따르게 한 가장행렬이다.

여원무는 이러한 전설을 안고 수백년 내려오는 무형문화재이다. 그 춤의 차림이 특이하여 다른곳에 이와 비슷한 것은 찾아볼 수 없다. 머리에 쓰는 꽃관의 높이가 3m이며 온몸을 오색의 치마로 가리워 사람은 안보이고 거대한 꽃귀신을 연상케 한다.